2023.12.08 (금)
1980년 5월, 광주 구 도청 앞 금남로에는 전일빌딩이라는 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 건물은 도청 안팎에서 광주 시민들이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고, 헬리콥터에서 쏜 기관총 245발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외신 기자는 전일빌딩 옥상에서 그날의 참상을 모두 카메라에 담은 후 목숨을 걸고 광주를 빠져나와 수백명이 죽어간 그날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오늘 전일빌딩은 ‘전일빌딩245’라는 새 이름을 갖고 42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공수부대원들의 군화에 짓밟히던 도청 앞은 깨끔하고 포근한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빌딩 벽에 박혀 있던 총알은 하나하나 빼내서 흔적만 남아있지만 아직도 전일빌딩을 바라보고 있자면 왠지 모를 비장함이 느껴진다.
매일 오후 5시 18분이 되면 전일빌딩 옥상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차분하고 또렷한 멜로디로 퍼져나간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에 소설가 황석영씨가 작사하고, 전남대학교 학생 김종률씨가 작곡하였으며 5.18 당시 사망한 두 남녀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곡이 갖는 상징성은 정말 커서 5.18 관련 행사 뿐만 아니라, 웬만한 시위 현장에서는 대부분 이 곡을 들을 수가 있다. 이곳에 처음 와서 저 멜로디를 듣는 사람은 신기한 듯이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노래를 아는 사람은 콧소리를 섞어서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전일빌딩 주변에서 생업에 종사하시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매일같이 듣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알려주는 의미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부여하긴 좀 어렵다. 사실 전일빌딩245 근처에는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 많은데, 공시생들은 그 노래만 들으면 우울해지니 임을 위한 행진곡 좀 제발 틀지 말라는 민원이 쉬지 않고 들어온다고 한다.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마저도 무뎌지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42년 전 전일빌딩 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죽어간다. 그런데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42년 전 5월의 슬픔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꽉 막혀버린 채 갈팡질팡하며 보내버린 지난 2년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2022년 5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을 때마다 1980년 5월을 기억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매년 5월 이맘때나 되어야 5.18이 있었다는 사실을 스치듯 떠올리지 일 년 내내 5.18이 일어났던 광주를 기억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그날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 멜로디는 한 번이라도 그날을 때때로 기억해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을 사는 당신에게 5.18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람들, 손님에게 웃으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자에 엉덩이 딱 붙이고 수험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가 흘린 뜨거운 피로 인해 겨우겨우 가능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청춘들이 죽음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총칼과 맞서 싸우며 흩뿌린 피 때문에 말이다.
오늘도 임을 위한 행진곡 멜로디는 전일빌딩 주변을 넓게 덮었고, 전일빌딩 앞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은 다들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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